시련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영화, 춘희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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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쇠와마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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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22-04-12 오후 6:04:16 |
1_감독의 '꿈'에서 탄생한 영화 J.R.R.톨킨은 옥스퍼드 대학 재임시절, 교수연구실에서 채점 중 막간 선잠을 꾸벅 졸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그의 머릿속에서 문득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땅 속, 어느 굴에 호빗이 살고 있었다." 이 도무지 영문을 알 길 없는 내용의 문장에서 <호빗>이 출발하게 된다. 톨킨은 이후 평생에 걸쳐 결국 20세기에 창조된 가장 거대한 가상신화, 중간계 연대기를 이어가게 된다.<태어나길 잘했어>의 탄생과정도 이와 닮은꼴이다. 최진영 감독은 제주 4.3을 다룬 단편 <뼈>를 촬영하면서 심신을 소진해가던 중 오랜만에 꿀맛 같은 낮잠에 빠졌다. 그런데 꿈에서 자신이 벼락을 맞아 여자와 남자로 자아가 분리되는 상황을 겪는다. 심지어 둘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잠에서 깬 감독은 이 기이한 내용을 메모한다.꿈에서 체험한 이야기는 각색을 거쳐 여러 편의 단편으로 인정받아온 감독의 첫 장편 <태어나길 잘했어>로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감독 본인의 꿈에서 출발했다는 건 이 이야기가 지극히 사적인 의식/무의식적 경험에서 비롯되었음을 암시한다. 그 뼈대에다 감독이 관심과 애정을 가진 존재들, 지향해왔던 세계관이 근육과 살들로 하나둘 채워 넣어졌다. 그 결과물에는 일상의 팍팍함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소수자와 결핍을 지닌 존재들을 예찬하고 위로하는 정서가 가득히 담겨 있다. 감독의 그런 바람을 온전히 담아서 표현하기 위해 약간의 판타지 장치가 적절하게 활용된다. 그리고 다채로운 소품과 촬영지역의 숨어 있던 명소 공간이 배경을 꽉꽉 보충한다. 그런 배치 덕분에 감독이 구축한 영화 속 현실에 공명하는 이들은 자신이 듣고 싶고 보고팠던 환상을 본 작품을 통해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 세계에 공감능력이 그리 생기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근래 한국독립영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경향, 즉 치유와 위로의 임시처방약 같은 일군에 또 하나의 추가목록으로 기억될 테다.
2_1998년, IMF 구제금융의 기억 속으로영화는 시작과 함께 (많은 관객이 아마 깜빡 놓치겠지만) 1998년이란 시대배경을 분명히 드러낸다. 많은 이들의 예측 가능했던 삶이 IMF 구제금융의 격랑 속에서 소용돌이치던 그때다. 어린 춘희는 (구체적으로는 밝혀지지 않는) 일련의 상황으로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한다. 천애고아라 마지못해 받아준 친척집에서 짐짝 취급 받는 어린 춘희는 손에 땀이 맺히는 다한증을 구실로 집이건 학교에서건 무시와 차별을 겪는 신세다.
아마 장례절차를 마치고 막 돌아온 듯 외삼촌의 집에서 춘희는 누가 들어오라고 하지 않으면 현관 앞에서 마냥 기다려야 하는 처지다. 어리지만 자신의 상황을 모르지 않는 눈치다. 굴러온 돌멩이처럼 대접받는 춘희에게 주어진 공간은 오래된 단독주택이라면 종종 갖추고 있었던 다락 골방이다. 창고로 쓰면 딱 적당할, 요즘 세대에 이해가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캡슐호텔 크기의 사방이 막힌 곳. 사지 쭉 펼치는 게 불가능한 이곳을 마치 힘없는 야생동물 둥지처럼 유일한 자신만의 공간으로 의지해 살아간다.
외삼촌의 집도 그리 평화롭지 않다. 공무원으로 비교적 안정된 가정이지만 공부를 잘해 명문대에 진학한 집안의 기대주 외사촌 오빠는 운동권이 되었고 또래 사촌은 날라리다. 외숙모는 신경이 곤두설 때는 어린 춘희에게 모진 말을 툭툭 내뱉는다. 오직 할머니만이 춘희를 안쓰러워하며 위로하지만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 학교에서도 춘희는 따돌림의 대상이다. 영화 초반 무용실에서 춤을 연습하는 춘희에게 연습상대가 되어주려던 교사는 다한증에 질겁해 그녀를 외면한다. 춘희는 늘 혼자 견디고 버티는 데 익숙해져 간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춘희는 어른이 되어 있다. 여전히 다락에서 기거하지만 이제 외삼촌 식구는 그 집에서 살지 않는다. 춘희는 홀로 집을 지키며 매일 수작업으로 마늘을 까서 외사촌 오빠가 운영하는 곰탕집에 납품하고 일당 3만 원을 받아 생활한다. 다한증을 고치기 위해 수술비도 통장에 차곡차곡 적립하는 중이다. 청소년기의 소박데기 시절을 딛고 그럭저럭 춘희는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춘희의 단조롭던 일상에 소소한 변화들이 찾아온다. 심성이 고운 춘희는 주변에 잔정을 베풀곤 한다. 심리치유 교실에 다니게 된 춘희는 그곳에서 말을 더듬지만 자상한 남자 주황을 만난다. 서로에 대해 타인들이 함부로 재단하던 편견이 없는 둘은 가까워지고 어느새 수줍은 교제를 시작한다. 길에서 발견하고 얼어 죽을까봐 깨웠던 노숙자에게 외사촌 오빠가 준 마사이 운동화를 나눠주고 종종 오가며 친구처럼 지내게 된다. 그녀의 생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긍정적으로 바라봐 주는 생소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춘희다.
그러던 어느 날 춘희는 그녀가 늘 지나다니던 터널 앞에서 말 그대로 '벼락'을 맞는다. 목숨은 건졌지만 그 후부터 문득 어린 시절의 춘희가 어른인 춘희 앞에 불쑥 나타나곤 한다. 춘희는 처음에는 귀신을 본 것 마냥 화들짝 놀라지만 금방 적응하게 된다. 이제 춘희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이것저것 질문도 하고 궁금했던 것을 확인해보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춘희의 어릴 적 감춰져 있던 여러 상처들이 추가로 드러난다. 그런 특별한 계기를 겪으며 늘 변함없이 흐르던 그녀의 시간에는 이제 거듭 격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과연 이 엉뚱 발랄한 이야기의 결말과 춘희의 인생은 어떻게 귀결될까3_이야기를 전방위 지원하는 전주의 공간과 배경들
<태어나길 잘했어>에는 감독 자신의 체험과 취향을 바탕으로 삼은 소소한 장치들이 세밀하게 꽉꽉 들어차 있다. 이 장치들의 일부는 때로는 그저 감독이 넣고 싶어서 추가시킨 것 마냥 느껴질 순간도 있긴 하지만 이야기 맥락을 보다 풍성하게 해석하는 데 활용되곤 한다. 주인공들이 만나고 부대끼는 주요 배경으로 감독이 태어나고 자라서 떠나지 않고 활동 중인 전주의 풍광이 전면적으로 투입되는 점이 특히 눈에 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주인공들의 성장을 상징하는 배경으로 활용했던 '한벽터널'은 실은 본 작품에서 먼저 촬영되고 중요한 배경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철도가 다니던 길쭉한 동굴 같은 터널은 그 이미지를 살려 주인공 삶의 주요한 분기점이라는 상징성을 묘사하는 데 잘 어울리는 면모를 뽐낸다.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본 작품에서의 등장으로 전주관광의 새로운 명소가 될 판이다.
춘희가 영화 속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물게 되는 추억 많은 집은 지역 복합문화 공간 '철봉집'이 담당한다.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 대안적 공간으로 지역에서 활용되는 본 건물은 특이하게 실내에 철봉이 달려 있는 건축 특징 때문에 영화에서도 평범한 실내 풍경에서 조금 동떨어진 이채로운 색깔을 더한다. 특히 춘희만의 최후 요새라 할 다락방은 어릴 적과 성인이 된 후 소품과 디자인의 변화로 주인공이 경유해온 시간의 흐름과 캐릭터 속성에 대해 무언의 해설을 더하는 공간으로 쓰인다. 춘희와 사랑에 빠진 주황이 수문장 복장을 하고 일하는 곳은 전주투어 필수코스인 '경기전'이 실제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활용된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지역 독립영화판을 지켜온 감독의 현장 로케이션 능력이 적절히 발휘된 예시들이다.
소품과 음악의 활용도 영화 속 시간 배경(과 감독의 기호)에 맞춰 꾸며져 있다. 공간적 배경이 감독의 전주 토박이로서의 강점을 십분 발휘했다면 소소한 소품과 음악은 감독과 제작진들이 평소에 애정하던 것들로 채워진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싱어송라이터 양창근의 '우리의 이유'는 엔딩 곡의 가사로 영화 주제를 거의 압축해 놓은 듯 싱크로율을 선보인다. 정체불명의 노숙자와 춘희가 마주쳤을 때 긴장감을 완화하는 데에는 (감독이 어릴 적 즐겨 들었을) 자우림 2집 수록곡 '이런데서 주무시면 얼어죽어요'가 절묘하게 투입된다. (원래 노래 자체가 그 시절 급격히 늘어나던 노숙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만들어졌기도 하다)
춘희의 다락방에 채워진 아이돌 사진은 감독의 소장품, 철봉집 구석구석을 채운 물건들은 스태프들의 집을 박박 긁어서 시대 배경에 어울리는 것들을 비용을 크게 쓰지 않으면서 활용해낸다. 콜라병 하나도 요즘 보는 흔한 페트병이나 캔이 아닌, 유리병 콜라가 등장할 정도로 나름대로 저예산에도 공들인 티가 팍 난다. 그렇게 졸졸 흐르는 물줄기처럼 한데 모여든 소품과 장치들이 보여주는 풍경은 꽤 아기자기하고 영화의 적당한 현실과 판타지 경계를 꾸미는 데 일익을 담당하는 데 크게 모자람이 없다.
4_영화를 완성하는 배우들의 조합과 포인트한국독립영화에 관심 많은 이들이라면 춘희 역을 맡은 강진아 배우는 익숙한 얼굴이다. 오랜 내공과 경력을 바탕으로 다른 춘희를 상상하기 힘들 만큼 온전하게 춘희의 이미지를 형상화해냈다. 씩씩하지만 종종 엉뚱한, 하지만 사랑 받지 못했으되 세상의 연약한 존재들을 애틋하게 염려하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춘희가 화면 안에서 살아 숨 쉬도록 열연을 펼친다. 춘희와 사랑에 빠지는 주황 역 홍상표 배우 역시 주로 코믹한 조역으로 다양한 작품에서 봐왔지만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제안을 받고 서로 상처를 보듬는 연인들의 호흡을 마음껏 선보인다. 익숙한 배우들의 의외성 조합이 오히려 신선함을 발산하는 캐스팅이다.
특히 눈에 띄는 건 김세인 감독의 <컨테이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여 감독이 점찍었다는, 어린 춘희 역 박혜진 배우다. 전작에서도 수해 와중에 외톨이가 된 청소년 역할로 등장했던 배우가 애달파 보였는지 최진영 감독은 어린 춘희에게 시련을 안기면서도 결국 영화 제목처럼 위로와 격려를 보내려는 의도로 캐스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감독의 의도가 제대로 구현되어 전작으로부터 전혀 연속성이 없는 <태어나길 잘했어>이지만 배우 개인으로선 캐릭터가 탈 없이 성장한 것처럼 느껴지는 재미가 특히 반갑다. 아직 스무 살이 채 안 되었지만 이후 주목해야 할 배우다.
외삼촌 넷 중 가장 오래 춘희와 연을 이어가는, '혁명'을 꿈꿨지만 이제는 소시민이 된 외사촌 역 임호준 배우는 독립영화 '다작왕'이라는 칭호로 불릴 정도로 여러 작품에 부름 받는 중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같은 날 동시에 개봉하는 독립 장편영화 <복지식당>과 <태어나길 잘했어>에서 전혀 다른 이미지를 소화해낸다. 그나마 춘희에 대해 관심과 미안함을 갖고 있지만 가족의 한계를 넘어서진 못하는 존재다.
외숙모 역 김금순 배우와 할머니 역 변중희 배우 역시 믿고 보는 연기자들이다. 외숙모는 춘희에게 종종 상처를 안기지만 '외지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며 미워할수만은 없는 존재로 자리잡는다. 할머니는 가정에서 힘을 잃었지만 어린 춘희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한줄기 샘물 혹은 바람처럼 버틸 힘을 주는 우군이다. 주인공들에게 집중된 분량 때문에 명품 배우들에게 부여된 다소 정형화된 역할이 좀 아쉽긴 하지만 각자의 개성을 잘 살려내는 베테랑다운 풍모를 선보이고 있다.
반면에 '씬 스틸러'로 매복했다 불쑥 튀어나오듯 대활약을 펼치는 노숙자 역 황미영 배우의 존재감은 분량에 비해 몇 배나 강렬하다. 특히 둘 사이 우정의 가교가 되는 마사이 운동화를 통해 설파하는 경구는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와도 직결되기에 꼭 챙겨야 할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춘희에게 조금이나마 이해를 전하는 이들이 사회적으로는 모두 마이너리티에 속하는 존재들이란 건 감독의 세계관인 동시에 약자들의 연대를 영화적으로 구현하는 실례이기도 하다. 크게 부각되진 않지만 영화 속에서 춘희에게 '해꼬지'를 하던 이들은 대부분 나름의 징벌을 받고 만다는 것도 감독이 꿈꾸는 세상에 대한 작은 단초에 속할 것이다.
5_동토를 뚫고 참된 봄을 만나기 위한 춘희의 도전
춘희의 이름을 풀이하면 '봄 춘', '여자 희'다. 하지만 고운 이름과 달리 춘희는 아직 인생에서 봄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상태다. 영화 속에서 춘희는 내내 빨간색 계통의 겨울옷차림을 두텁게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춘희에게 영화 속에서 봄은 어떻게 찾아오는가를 찬찬히 관찰하는 게 본 작품을 보는 바른 경로이자 재미를 발견하는 과정일 테다.
춘희는 세 번 태어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봄을 맞이하게 된다. 그 세 번의 전환점은 모두 쉬운 경우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처음 태어났을 때 당연히 갓난아기 춘희는 울음을 터트리며 자기 미래를 알지 못한 채 등장했을 것이다. 두 번째 탄생은 부모를 여의고 홀로 살아남은, 오랫동안 구박과 소외에 시달릴 때 차라리 그냥 그때 운명을 같이 했으면 하는 회한으로 어린 춘희를 괴롭혀왔을 테다. 그리고 그런 번뇌를 숨긴 채 조금 조금씩 자신의 운명을 바꿔보려 시도하던 춘희에게 떨어진 벼락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을 때부터가 세 번째 탄생의 대전환점이다. 하지만 그저 춘희의 봄은 얻어질 수 없다. 알을 깨고 낯선 세상에 용맹하게 뛰어드는 것처럼 춘희는 너무 익숙해져버려 안주해온 다락을 벗어나야 한다.
영화는 그저 자기애에 빠진 주인공을 위한 임시방편 위안이나 치유를 억지로 끼얹거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 격으로 요행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판타지 요소는 현실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더 정면으로 직면하도록 돕는 데 철저히 복무한다. 시련과 고통을 감내하며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진정한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한 춘희의 도전과 그 과정에서 어린 춘희가 듣고 싶었을, 더도 말고 덜도 아닌 딱 한 마디의 위로. 그 가치에 공감할 수 있다면 <태어나길 잘했어>는 제목 그대로 영화 속 춘희와 바깥의 관객들에게 각박한 세파를 견뎌내고 미래로 전진하기 위한 마법의 주문으로 새겨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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