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 신화를 써 내려갈 무렵.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에는 또 하나의 화젯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로또였다. 그때 당시 한 게임에 만 원이었고, 몇 주째 1등 당첨자가 나오지 않아 당첨금이 무려 몇백억 가까이 올랐던 때가 있었다. 중학생이었던 우리는 미성년자라 법적으로 복권을 살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씨 좋은 복권방 아저씨는 아버지 심부름이라는 우리의 거짓말에 항상 속아 주셨고, 우리 반 아이들 몇 명은 매주 로또를 샀다. 나도 그 무리 중 하나였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우리 중에 당첨자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산 로또를 잊고 있던 나는 월요일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교탁에 비치된 컴퓨터로 번호를 조회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학교에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비록 1~2등은 아니었지만 당시 우리에게는 거금인 40만 원가량이 당첨되었던 것이다. 내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철민이가 외쳤다.
"야, 야! 승호 로또 당첨됐다!!"
"와~! 이게 대체 얼마야? 너 무슨 번호였어?"
내 용지를 뺏어 잠시 쳐다보던 명준이가 말을 이었다.
"어? 자동이네? 야~ 너 운 되게 좋다. 뭐 좋은 꿈이라도 꿨냐?"
"어? ···생각해 보니까 진짜로 꿈을 하나 꾸긴 했어."
"무슨 꿈 꿨어?"
"로또 사기 며칠 전에 꾼 꿈인데 내가 어디 공원 같은 곳에 앉아 있었거든. 그리고 어떤 여자가 내 옆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 순간 눈 돌려 보니까 그쪽에 여자가 없는 거야. 그런데 의자 위에 금덩어리가 하나 있었어."
"진짜야? 와, 죽이네."
나는 당첨된 로또 용지를 가지고 어머니께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따끔하게 혼내기는 하셨지만 사고 싶은 것을 사라며 당첨금 절반을 주셨다.
그리고 몇 주가 흘렀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예전에는 주 5일제가 시행되기 전이었다. 그 시절 나는 딱 과도기에 있었는데 격주로 토요일에 학교를 갔을 때였다. 다음 날이 등교해야 하는 토요일이라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펼쳐진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그날도 꿈에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어김없이 전에 봤던 여자와 똑같은 차림의 여자가 있는 것이었다. 저번에 꿈을 꿨을 때는 내 시선과 완전히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오늘은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창 사춘기의 나이에 얼마나 여자에 관심이 많았겠는가. 자세히 그녀의 옆모습을 보니 정말 아름다웠다. 말이나 걸어볼까. 어차피 꿈인데 뭐 어때.
"저, 저기 누나···. 저기요."
그녀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살짝 올린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앉아 있던 곳에 또다시 금덩어리가 있었는데 지난번 꿈보다 두 배 이상 커져 있었다.
다음 날 다시 학교에 가서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축구를 한 뒤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 명준이가 말을 걸어왔다.
"어우, 뜨거워. 승호야. 너 또 로또 샀어?"
"아니. 야, 그런데 오늘 학교 끝나고 또 사야 될 것 같아."
"왜? 또 무슨 꿈 꿨어?"
"어. 그때랑 똑같은 꿈 꿨어. 그런데 여자 얼굴도 아예 안 보이다가 이번에는 반쯤 보이고, 금덩어리도 훨씬 커져 있더라고."
나의 말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친구들이 주위로 몰려왔고, 나는 꿈 이야기를 다시 들려줬다. 잠자코 듣고 있던 명준이가 말했다.
"야, 승호야. 그 꿈 나한테 팔아라. 내가 만 원 줄게."
"에이, 뭔 소리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냐, 인마."
"야. 일단 받아라, 만 원. 자, 내 전 재산이야. 네 꿈 내가 산다!"
그렇게 억지로 내 주머니에 만 원을 쑤셔 넣은 명준이는 신이 나서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나와 철민이가 이 돈으로 뭘 할지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상민이가 뒤에서 조용히 한 마디 했다.
"그러지 말지···."
상민이라는 친구는 우리가 못 보는 무언가를 보거나 느끼는 친구였다. 당시에는 우리도 상민이와 친하지 않았었고, 학교에서 나름 우두머리로 통했던 철민이는 기분이 나빴던지 상민이에게 욕을 했다.
"야, 너 뭐라 했냐? 이 새*가 돌았나. 너 우리 말 엿들었지?"
보통 친구들은 철민이가 그렇게 눈을 까뒤집으면 바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는데 상민이는 좀 달랐다.
"제3자는 빠져. 야, 승호야. 너 그런 거 하지 마. 진짜 큰일 난다."
"이 자식 이거 안 되겠네. 야. 너 끝나고 체육관 뒤로 따라와라."
"야 야 야, 됐어, 철민아. 그냥 가자. 그리고 상민아. 뭐 별일이야 있겠어? 아무튼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렇게 길길이 날뛰는 철민이를 나는 억지로 끌고 돌아왔다. 그리고 설마설마했던 상민이의 말이 내 눈앞에 다가오기까지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토요일에 명준이가 내 꿈을 사 간 후 일요일 새벽쯤이었다. 엄마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라며 나를 깨우셨고, 비몽사몽간에 전화를 받았더니 명준이 녀석이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잠에 취해 명준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학교에서 이야기하자며 그냥 끊어 버렸다. 그렇게 월요일이 되어 학교에 나가자 미리 와서 자리에 엎드려 있던 명준이와 그 옆에서 명준이를 쳐다보던 철민이가 내게로 왔다.
"야···. 이거 좀 이상해···."
"뭐야. 너 다크서클 무릎까지 내려가겠다. 철민아. 얘 왜 이래?"
"장난하지 말고 들어 봐. 야. 나도 너랑 똑같은 꿈 꾼 것 같은데, 그 여자 혹시 검은색 원피스에 구두는 하얀색 번쩍거리는 거 신고 있지 않았어?"
"어? 맞아. 진심 신기하네! 야, 근데 번쩍거리는 게 뭐냐? 에나멜 구두 모르냐, 에나멜."
"아, 입 좀 다물어 봐. 아무튼 나는 그 여자 얼굴 봤는데 진짜 그것 때문에 토요일, 일요일 한숨도 못 잤어."
"헐, 얼굴을 봤다고? 예쁘냐?"
"아니···. 그 여자 말이야. 네가 본 왼쪽 얼굴은 사람 얼굴인데, 와··· 오른쪽은 진짜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얼굴이 반쯤 녹아내렸다고 보면 돼. 눈알은 형체만 있고 보이지도 않아. 그리고 네 꿈에서 그 여자가 다른 곳으로 갔다고 했지? 나는 아니야. 나한테 점점 다가왔어. 헤벌레 웃으면서 말이야. 또 거기가 공원이 아니더라. 어떤 숲이었어. 아무리 달려도 끝이 안 나오더라고. 그 뒤로 눕기만 하면 그 꿈 계속 꿔서 진짜 제대로 한숨 잘 수가 있어야지. 이거 어째야 되냐···."
"내가 어떻게 알아?"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철민이가 끼어들었다.
"야.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꿈을 사는 게 말이 되냐? 야, 이거 받아. 명준이 네 거, 내가 살게."
"야, 하지 마···. 너도 큰일 나면 어떡해?"
"에이, 그런 건 믿을 게 못 돼."
그렇게 철민이가 명준이의 꿈을 샀고,
이튿날 예상대로 명준이는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그런데 철민이가 문제였다. 녀석은 풀이 죽어서 우리에게 말했다.
"야···. 이거··· 진짜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 점점 심해지는 것 같은데···.
명준이 너는 쫓아왔다고 했지? 나는 그 여자가 나를 밀어갖고 굴렀거든?
그런데 내 다리 한번 봐 봐. 꿈에서 정강이가 엄청 아팠는데 일어나 보니까
다리에 이렇게 멍이 새파랗게 들어 있었어.
야, 이거 무슨 저주 같은 거 아냐?
씨, 복권 한번 당첨되겠다고 했다가 사람 잡겠네."
그렇게 우리끼리 이야기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을 게 뻔했다.
그때 문득 내 뇌리를 스치는 한 명. 바로 ‘상민이’. 상민이었다.
"야, 철민아. 너 기억나? 명준이한테 꿈 판 날에 상민이가 했던 말."
"아~ 걔? 걔가 왜?"
"상민이는 뭘 좀 아니까 그때 우리한테 그러지 말라고 했던 거 아니겠어?
상민이한테 한번 물어보자."
"아나, 씨···. 그때 내가 그렇게 심하게 말했는데 고분고분 들어주겠냐?
야, 됐어. 며칠 지나면 괜찮겠지."
"그럼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한번 말해 볼게."
"그래, 그래. 승호가 말하게 내버려 두고 너는 가만히 있어."
"그때 윤정이한테 들었는데 자기 엄마가 엄청 아팠을 때도
상민이가 도와줬다고 하더라."
그렇게 우리 세 명은 창가에 앉아 사색에 잠겨 있는 상민이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저기··· 상민아. 우리 잠깐 얘기 좀 할래?"
"어? 그래. 무슨 일인데? 왜, 또 철민이가 나한테 불만 있대?"
"그때 그 일은 진짜 미안해. 야, 짜샤. 너도 빨리 사과해.
지금 너한테 붙었잖아."
"그래···. 상민아. 저번에 내가 욱해서 욕한 거, 정말 미안해."
"상관없어. 한두 번도 아닌데. 그런데 무슨 일이야?"
나는 그간 우리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고,
묵묵히 듣고 있던 상민이는 명준이와 철민이에게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낸 후 이렇게 말했다.
"어이고, 내가 그래서 하지 말랬잖아.
흔히 꾸는 돼지 같은 동물이 나오는 꿈도 아니고,
누군지도 모르고 얼굴도 안 보여 주는 사람이 나오는 꿈을 왜 사고파냐."
"어떻게, 방법이 없겠냐?"
"일단 너희들이 계속 붙들고 있어 봐야 해결이 안 될 거야.
그나마 승호 네가 명준이한테 안 넘기고 가지고 있었으면
그러다 말았을 수도 있는데.
철민이는 며칠 더 두면 진짜 제대로 생활 못 할걸?
일단 철민이 네 꿈, 내가 살게. 자, 돈 받아."
"너, 괜찮겠어? 이거 진짜로 장난 아니야."
"괜찮아. 안 그래도 내일 엄마 보러 갈 생각이었어.
우리 엄마가 이런 거 해결하실 수 있거든.
그리고 너희들이 믿든 안 믿든 상관없지만
철민이 너는 진짜 귀신 들러붙기 딱 좋은 기운이야.
앞으로는 미신이네, 어쩌네 괜한 자존심 때문에
이런 일에 말려들지 마. 진짜 큰일 난다."
"알겠어···."
그렇게 처음 내가 꿨던 길몽인지 흉몽인지 모를 그 꿈은
마지막으로 상민이 녀석에게 넘어갔고,
이튿날 상민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물론 철민이는 그날부터 그 꿈을 꾸지 않았고,
우리는 그녀에게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상민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는 걱정을 안고 하교를 했다.
그렇게 수요일이 되자 다행히 상민이는 학교로
나와 아무렇지 않게 수업을 들었다.
4교시가 끝난 후, 나는 상민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상민아. 너 괜찮아?"
"어? 어. 그 여자는 엄마가 쫓아 버리셨어."
"어머니께서 그 꿈은 대체 뭐라고 하시던데?"
"귀접이야, 귀접. 사람 몸을 취하고 싶은 귀신이 꿈에
나와서 슬슬 간을 보다가 어느 순간에 딱 들러붙는 거지."
"헐···. 그럼 그게 귀신이었단 말이야?"
"음···. 일반인들한테는 귀신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긴 하겠네.
왜, 저번에 그 이야기 기억나?
옆반에 어떤 애가 맨날 꿈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헛짓거리하는 꿈 꿨다는 거."
"아~! 걔 전학 갔잖아."
"그래. 그것도 우리 엄마가 구해 주신 거야.
그 녀석 같은 경우는 아예 들러붙어서 엄청나게 고생했지."
"그럼, 앞으로 이런 꿈 꾸면 어째야 돼?
나는 진짜 이 일 있고 나서 잠자기가 무서워.
또 그 꿈 꿀까 봐.
그래서 요즘 푹 자려고 자기 전에 한 시간씩 밖에서 뛰어다녀."
"괜찮아. 앞으로도 충분히 꿀 가능성은 있어.
앞으로는 절대 그 꿈에 의미를 부여하지 마.
부여하는 순간 꿈을 사고파는 게 가능해지거든.
그게 돈이건 뭐건 간에. 동물이나 평소에 네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나오는 꿈은 상관없는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혼자 나오는 꿈
절대 의미 부여하지 말고,
기억이 나더라도 잊으려고 노력하면 돼.
아, 그리고 남한테 절대로 이야기하지 마. 나 먼저 갈게."
이번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승호는 그 뒤로도 이와 비슷한 꿈을
여러 번 꿨다고 한다.
하지만 상민이가 알려 준 대로 절대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잊으려고 노력했더니 괜찮았다고 한다.
여러분도 위와 같은 꿈을 꾸게 된다면 꼭 조심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