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성별이 사회에서 겪게 되는 문제에 대해 얼마나 연대하고 그것을 해결해나가려고 노력하는가는 남자나 여자의 공감적 능력 차이나 연대 능력의 차이 같은게 아니라 그 경험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가, 혹은 미래에 겪을 가능성이 있는가의 차이인 것 같다.
이는 넷플릭스 드라마 D.P에 대한 남성들의 후기와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에 대한 여성들의 후기만 봐도 알 수 있다. 전자의 경우 늘상 군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반복되었던 천하제일 노예자랑대회가 펼쳐졌다. 이미 군 복무를 마친 군필자들에게 D.P의 줄거리는 너무나도 공감이 되지만 앞으로 자신이 겪을 가능성은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모든 논의가 '내가 경험했던 과거'에 치중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82년생 김지영의 경우 어떤 여성들은 그 안의 이야기들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고 어떤 여성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이들에게 과거 경험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김지영씨가 겪은 이야기들은 여성들에게 '내가 경험할지도 모르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사실 D.P나 82년생 김지영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한 경험을 한 비율을 따져보면 당연히 징병률이 95%에 육박하는 남성들이 높을 것이다. 2021년에도 군대 내에서 쏟아져나오는 사건 사고들은 아직도 군대 문제 개선은 한참 멀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 전체 남성의 절대다수인 군필자들은 굳이 그 문제에 대해 연대하고 공감할 이유가 없다. 이들의 내면에 있는 것은 '미래의 개선된 군대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이제는 마땅히 보상받을 방법도 없는 '과거에 경험한 군대에 대한 분노'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군대 이야기는 엄연히 따지면 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들은 18개월이나 걸리는 현역 복무 환경보다 3일짜리 예비군 훈련 환경의 개선을 우선적으로 바랄 것이다.
한편 여성들의 경우 김지영씨와 같은 경험을 과거에 겪었는가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실제로 그러한 경험을 겪지 않았다 하더라도 앞으로 겪을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인 경험' 이기 때문에 이는 마냥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혹자는 이를 피해망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쨋든 여성들에게는 그 이야기들이 자신의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 책 하나로도 수 많은 연대를 통해 실제로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저 둘을 비교하기위해서는 이것 말고도 많은 요소를 따져봐야한다. 군대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남성이라는 점, 김지영씨의 경우 가해자는 남성/피해자는 여성인 경우가 많다는 점, 군대는 징병된 이상 무조건 경험하는 것이지만 여성은 모든 이들이 김지영씨와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보편성의 차이), 여성이 경험하는 사회보다 군대는 더더욱 폐쇄적이고 그 특수성이 너무 강하다는 점 등등... 다만 젠더이슈에서 항상 거론되는 군대 문제가 그것을 경험하는 남성의 비율이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위의 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성들의 문제? 난 여성이라서
여성들의 문제? 난 남성이라서
잘 모르겠네. 내 문제가 더 급해서.
이런 문제, 다 너 때문이잖아.
나 때문이라고? 너가 먼저 시작했잖아."
모두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고 그 경중을 따질 필요가 없는데도 모두가 가해자를 찾기에만 혈안이 되어 물어 뜯고 싸우기만 하는 사회, 나와 상관없는 문제에 대해 무관심으로 답하는 사회, 타인의 어려움보다는 나의 어려움을 인정받길 원하는 사회다. 한 걸음만 양보해서 내가 겪지 않는 타인의 문제를 인정하고 해결해보려고 하면 좋을텐데...라는 아쉬움이 오늘 하루 내 눈에 들어온 미디어의 세상에서 또 다시 한 움큼 쌓였다. 아, 이젠 이 아쉬움이 그냥 이상적인 망상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미 이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인 것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