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제가 스무 살이 되던 늦여름 8월 말쯤이었습니다.
친한 친구 놈 중 하나가 어릴 때부터 태권도장에 다녀서
전 태권도를 배우진 않았지만 자연스레 태권도장에 종종 놀러 다니곤 했죠.
태권도장에는 우리와 나이 차가 많이 나지 않는 사범 형이 있었고
사범 형, 형의 친구분, 나, 내 친구 이렇게 넷이 종종 어울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8월 여름이 다 지나갈 무렵, 바다 한번 못 가 본 게 아쉽기도 해서
넷이서 당일치기로 속초 여행에 다녀오기로 했고,
관장님의 특별 허락 하에 주말에 도장 스타렉스 봉고차를 끌고
속초로 여행을 갔죠.
아침 일찍 출발해서 바다 볼 것 다 보고 회도 먹고
운전하는 사범 형 제외하고 다들 술도 한 잔씩 했고,
아쉽지만 원래 계획이 당일치기 여행이었기도 했고
차도 다시 도장에 둬야 하는 상황이라 밤 11시쯤에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서 그런지 다들 피곤해했고,
그나마 멀쩡한 제가 조수석에 타고 나머지 둘은 뒤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미시령 고개를 넘어갈 때쯤 저도 슬슬 졸려서 졸았다 깼다를
반복하던 중이었는데 운전하던 형이 욕설을 내뱉으면서 브레이크를
좀 세게 밟는다고 해야 되나,
아무튼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는 상태로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저 미친놈이, 미시령 고개 올라갈 때마다 앞에서 하이 빔 갈겨."
"에이, 형. 지금 앞, 뒤, 옆 어딜 봐도 우리 차밖에 없는데
형만 술 한 잔도 못해서 열받아 죽겠는데 사람들 다 잠까지
자니까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에요?"
"야, 그것도 사실 열받긴 하는데 그게 아니라 진짜로 봐봐.
지금도 하이 빔 날아왔잖아. 아이, 씨··· 진짜 어디서 날리는 거지?"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진짜 브레이크 살살 좀 밟아 줘요. 앞 유리에 헤딩하겠네."
"야, 너 진짜 이거 안 보여? 나만 보이는 거야?
장난치지 말고 형 화내기 전에 잘 봐봐."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았고,
뒤에서 자던 사람들도 다 일어나서 같이 보자 했지만
결국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냥 사범 형이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결론을 짓고
근처 아무 데서나 좀 쉬다 가자고 했습니다.
미시령 고개 정상에서 어느 정도 내려오는 길에 작은 음식점 하나를
발견하고 우린 저기서 뭐라도 먹고 쉬다 가자면서
그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김치찌개를 시키고 차에서 있던 일을 이래저래 얘기하다가
음식이 나왔습니다.
여행이 끝나 간다는 아쉬움 때문에 술도 한 잔 더 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어차피 좀 쉬다 갈 거, 아침에만 도착하면 되니까
그냥 사범 형도 술 한 잔 마시고 아예 새벽까지 쉬다가
서울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음식점에는 할머니 혼자 일하시는 것 같았는데
말씀도 적으시고 좀 차가웠다고 해야 하나,
그런 태도에 비해 음식 맛이 너무나도 훌륭해서 우린
김치찌개를 더 시켜서 포장도 하고 술도 몇 병 사서
모텔이나 여타 숙박 시설이 있으면 방 잡고 그곳에서
더 먹기로 했습니다.
음식을 포장해서 차에 탄 후 머지않아 모텔이 하나 나왔고
방을 잡으려는데..
"식사는 다들 하셨습니까?"
"네. 저 위의 식당에서 먹고 오는 길입니다."
"어··· 여기 근처에 식당 없는데요?"
"조금만 올라가면 하나 있어요. 할머니 혼자 계시는 데요."
"위에 올라가 봐야 식당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손님."
"아니, 우리 밥 먹었다는데 뭘 없다고 자꾸 그러십니까?
방이나 하나 주세요, 넓은 걸로."
"젊은 친구들, 귀신한테 홀렸나 보네. 허허."
약간 비꼬는 식. '내가 위에 식당이 없다면 없는 거다.'
이런 느낌의 뉘앙스로 말씀을 하셔서 포장해 온 김치찌개 있다고
보여준다고 말을 했더랬죠.
"야, 야. 김치찌개 어딨어?"
"차에 있나?"
차에 두고 아무도 안 챙겨 왔나 싶어서 차에 가 보니 포장해 온
김치찌개가 없었고 모텔 사장은 기분 나쁘게 웃으며
'거 봐, 내가 뭐라 했냐. 늬들 귀신한테 홀렸다.'
이런 식으로 재수 없게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린 분명히 먹었고, 우리가 포장해 온 걸 위의 음식점에 두고 왔다고
확신을 해서 가지러 다시 가려던 참에 모텔 사장이 자기 개인 차로
따라오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끼리 차에서 모텔 사장을 욕하며 위로 올라갔는데 우리가 간 뒤로
문을 닫으셨는지 불 꺼진 음식점 건물 하나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여기쯤인데 할머니가 주무시는 건지,
건물이 꽤 허름해 보여서 좀 이상했지만 일단 앞에 차를 세우고
사범 형 친구분이 김치찌개를 가지러 들어가셨는데
"우리 여기서 밥 먹은 거 맞지···? 야, 내려 봐···. 저기 한 번 들어가 봐···."
우리는 모두 음식점으로 들어갔고,
곧 머리부터 발끝까지 쫙 소름이 돋아서 누구 하나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쳐나왔습니다.
뭐랄까, 안에는 공사하다 만 듯한 인테리어에 거미줄도 장난 아니게 많았고,
무엇보다 안쪽으로 우리에게 맛있는 김치찌개를 주셨던
할머니 사진 하나가 보였는데 사진을 보는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고
한기가 돌아서 다들 말없이 차에 올라탔습니다.
차에 타는 순간 뒷좌석 안쪽에 뚝배기 그릇 같은 거랑 빈 소주 병이
다 뜯어진 검은 봉지 속에 있는 걸 보고 또 한 번 놀라서 밖에다
집어던져 버리고 그 음식점을 떠났습니다.
도로 외곽에 차를 대 놓고 잠시 담배를 피우며 진정시킨 우리는
그제서야 생각난 게 있는데 우리를 따라오던 모텔 사장이
안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걱정도 되고 언제부터 없던 건지 생각도 나질 않아 일단
모텔 쪽으로 다시 갔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모텔이 있어야 할 지점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건물 자체도 없었고 차를 갓길에 주차할 수 있는 넓은 공간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우린 진짜 대박이라고,
뭔가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다며 일단 여기를 내려가자고
의견을 냈습니다.
인제쯤에 도착해서 어느 정도 웃음도 찾고 정말 대박이라며
우리 모두가 동시에 경험했다고 그렇게 말하며 서울까지 올라왔네요.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사범 형 친구분이 알아봤더니
미시령 옛길 쪽에서 작은 숙박 시설과 음식점을 운영하던
한 가족이 미시령 고개를 내려가다가 올라오는 차량의 상향등빛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일가족 모두가
사망했던 사고가 있었다고 하네요.
그 형님이 장난기가 많아서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오싹했던 기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