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짜 짜증 나네···."
오늘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감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온종일 짜증을 내며 하루를 보냈다.
이런 내가 걱정이 되었던 걸까, 아니면 두려웠던 걸까.
누가 봐도 잔뜩 성이 난 얼굴을 하고 있는 나에게 회사 동료와 후배들이 술을 권했다.
이런 날에 동료들과 마시는 한 잔의 술은 나의 스트레스와 화를 해소시켜 줄 유일한 수단이었다.
나는 퇴근 후에 직원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고,
평소 주량 이상의 술을 미친 듯이 마셔 버렸다.
한참을 마시고 쏟아 내기를 반복한 끝에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우니 천장이 빙글빙글 돌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이대로 천장에 눌려 압사되는 건 아닐지 불안해지던 순간 속에서 욱 하고 올라오는 이물질이 목 안에 꽉 들어차는 느낌이 들었다.
"콜록, 콜록! 아···. 아, 어지러워···."
한참을 변기와 씨름한 끝에 진이 다 빠져 버린 나는 어느새 스르르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살며시 눈을 떠 보니 삼삼오오 모여서 저마다 쾌활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낯선 사람들이 보였다.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검은빛이 도는 짙은 회색 안개 때문인지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왠지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안갯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내 어깨를 꾹 눌렀다.
"엇···! 누구십니까?"
"안녕하세요. 처음 오셨나 봐요?"
"네? 아··· 여긴 어딥니까?"
"하하. 하긴, 대부분 처음 오시니 적응이 안 되실 겁니다."
지나치게 친절한 그 남자의 태도가 왠지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때 또 다른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저 사람 말은 듣지 말고 무시하세요. 여기서는 제 말만 들으시면 됩니다."
"어이, 아저씨. 지금 뭐 하자는 플레이야? 그렇게 험악한 얼굴을 하고서는. 그렇죠?"
나를 언제 봤다고 대뜸 친한 척을 하는 이 녀석도 재수가 없었지만
확실히 나중에 나타난 이 아저씨도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친한 척하며 나에게 다가오는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녀석은 내 팔짱을 끼며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가려 했다.
"까부는 것도 적당히 해. 내가 데려갈 거야."
"나 참···. 저기요, 아저씨. 아저씨 인상을 보면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그만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포기해요."
나는 두 사람 가운데에 서서 양팔을 붙잡힌 채 그들의 실랑이를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그때 내 시선이 닫는 곳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 중에 두 명이 갑자기 왼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으아아악─!"
"뭐··· 뭡니까, 이 소리는?! 왼쪽에서 들리는데요."
거의 울부짖음과 절규에 가까운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왼쪽에서 울려 퍼졌다.
그곳은 바로 험악한 인상의 아저씨가 나를 끌고 가려고 하는 방향이었다.
온몸이 가늘게 떨리면서 심장이 요동을 쳤고,
나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몹시 위험한 상황이란 것을 알아챘다.
"이런 젠장···."
"대체 저 소리는 뭐냐고요! 설명 좀 해 봐요."
하지만 아저씨는 내 손을 잡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반대편에서 내 손을 잡고 있던 녀석은 여전히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봐, 친구.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뭐, 뭐라고?"
"하, 나 참···."
남자는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내 앞에 다가와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전히 생글거리는 그 얼굴이 나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너, 죽었어."
그런 녀석의 말에 나는 아무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건 기껏해야 꿈이라고.
잠에서 깨어나면 금방 다 사라져 버릴 꿈이라니까.
그런데 내가 죽었다니···. 내가··· 죽었다고···?’
나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험악한 인상의 아저씨는 모든 걸 체념한 것 같은 모습으로 아무 말 없이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뭔가 안쓰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아저씨, 나 정말 죽은 겁니까? 진짜예요?"
그러자 아저씨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를 처음 봤을 때의 그 패기 넘치던 눈빛은 어느새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진짜 죽은 거냐고요! 그런 거냐고요, 아저씨!"
그런 내 물음에 아저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사람은 나를 왜 데려가려고 하는 건데요!"
"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거라고."
"너를 살려 주려는 거야!"
"그럼 아까 아저씨가 이끄는 곳으로 갔던 사람들은 뭡니까? 왜 이렇게 끔찍하게 비명을 지른 건데요!"
"이곳은 이승이 아닌 저승이야. 그리고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아주 두렵고 끔찍한 것들이 수도 없이 존재하고 있지.
너는 이승으로 가는 길에 그저 우연히 그것들을 봤던 것뿐이야. 그러니 흔들려서는 안 돼!"
"이야~ 이 아저씨, 간만에 봤더니 입 터는 기술이 장난 아니게 늘었네. 하하핫~."
아저씨의 말이 맞다면 정황상 왼쪽으로 가면 죽는 것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살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종일관 히죽거리고 있는 저 녀석에게는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아까 두 사람이 했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아저씨는 나를 살려 준다고 했고, 남자는 내가 살 수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고 했다.
결국은 같은 말이긴 하지만 뭔가 묘하게 다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왼쪽으로 갈 겁니다."
"뭐? 이봐, 친구.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봐!"
하지만 나는 남자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손을 뿌리쳐 버렸다.
"그래, 잘 생각했어. 어서 가자고."
그 말에 나는 아저씨의 손길도 확 뿌리친 후에 왼쪽을 향해 혼자서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어이, 기다려! 같이 가야 돼! 같이 가야 네가 산다고!"
달리기 시작한 지 1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눈앞에 문 하나가 보였다.
나는 내 뒤를 따라오는 아저씨를 피해 문안으로 들어간 후 있는 힘껏 문을 닫아 버렸다.
"안 돼! 문을 닫으면 안 돼!!"
"하하하하하하하~!"
문이 닫히기 직전에 들렸던 그 웃음소리는 뭐지? 그 녀석의 목소리인 것 같았는데···.
문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나는 주변을 더듬거리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였다.
누군가 나를 아래쪽으로 확 잡아당겼고,
나는 너무 놀라서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선생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자, 자. 침착하자고. 이대로 어레스트가 한 번만 더 오면 정말 끝이야."
내가 지금 수술을 받고 있는 건가? 다시 살아날 수가 있는 거야? 역시 아저씨 말을 믿길 잘한 것 같아.
그런데 그가 분명히 이런 말을 했었는데···.
‘이곳은 이승이 아닌 저승이야.
그리고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아주 두렵고 끔찍한 것들이 수도 없이 존재하고 있지.’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달리 나는 그저 바닥으로 쑥 빠져드는 느낌만 받았을 뿐 아저씨가 말했던
그런 끔찍하고 무서운 존재들은 보지 못했다.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던 걸까?
그래도 그와 함께 그 문안으로 들어갔다면 나는 이렇게 살아날 수 없었을지도 몰라.
나는 스스로 내린 판단과 결정에 만족하며 수술이 잘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삐, 삐, 삐이이이이이─"
"선생님, 다시 어레스트입니다! 선생님!"
"이대로는 더 이상 가망이 없어···."
잠깐. 저 목소리, 왠지 익숙한데?
"사망 시간 6월 26일 04시 47분. 보호자에게 알려 주세요. 마무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저 목소리는 아까 저승이라는 곳에서 만났던 그 녀석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아직 이렇게 살아 있는데···.
"흐아···. 크흐흣, 흐하하하하핫~!"
채 식지 않은 내 몸뚱이를 내버려 두고 한참 동안 혼자 수술실을 배회하던
그가 이내 마스크를 내리며 역겨운 웃음을 쏟아 냈다.
"어이, 친구. 아직도 어리둥절하지? 사는 것과 죽는 것.
그게 네 생각처럼 그렇게 쉬울 줄 알았어? 푸흣, 크흐흐···.
그러게 왜 네 멋대로 행동해서 살아날 기회를 그렇게 날려 버려?
그 아저씨가 같이 가야 한다고 그렇게 애원을 했는데 말이야. 하하핫···.
2분의 1 확률로 살 수 있었던 걸 왜 이렇게 만들어 버리냐고.
지금 내 목소리가 들리고 모든 걸 느낄 수 있으니 네가 살아 있는 것 같지? 훗,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남자는 내 앞으로 다가와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전히 생글거리는 그 얼굴은 나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너, 죽었어. "
그런 그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